소설 《형상》| 1편: 땅의 시선, 내가 만든 것들

“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” (창세기 1:24, 개역개정)

1편 ― 땅의 시선, 내가 만든 것들

땅은 그날을 기억한다.

말씀이 자신의 몸을 울리던 순간을. “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.” 그 음성이 닿자 땅은 온몸으로 응답했다. 깊은 곳에서부터 생명이 솟아올랐다. 들짐승이 흙을 뚫고 일어섰고, 가축이 첫 숨을 쉬었으며, 기는 것들이 땅의 살결 위를 처음으로 스쳐 지나갔다.

땅은 기뻤다. 창조주의 말씀을 받아 생명을 빚어내는 일. 물이 그러했듯, 자신도 창조의 동역자였다. 말씀은 하늘에서 왔지만, 생명은 자신의 몸에서 나왔다. 땅은 자신이 낸 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. 저마다 다른 걸음, 다른 울음, 다른 숨결. 모두 자신에게서 나온 것들이었다.

그중에서도 하나가 있었다.

뱀이었다. 땅이 낸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존재. 다른 짐승들이 본능을 따라 움직일 때, 뱀은 바라보았고, 헤아렸고, 기다릴 줄 알았다. 땅은 뱀을 지을 때 자신이 가진 가장 깊은 것을 담았다. 그리고 기다렸다. 창조주께서 자신이 낸 것들을 보시고, 그중에서도 뱀을 보시고, 기뻐하시기를.

물에서 난 것들에게 하셨던 것처럼.

“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” (창세기 1:22, 개역개정)

물고기와 새들은 복을 받았다. 땅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. 자신이 낸 짐승들에게도,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뱀에게도, 곧 복이 임할 것이라 믿었다.

그러나 그 복은 오지 않았다.

대신 침묵이 왔다. 세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말씀이 하나님 안에서만 오갔고, 그 침묵이 끝났을 때 창조주는 몸을 굽혀 흙을 집으셨다. 땅의 몸이었다. 땅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. 자신에게 명하지 않으신 채, 자신의 일부를 취하셔서,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형상을 빚으시는 것을.

그리고 그 형상 안으로, 생기가 들어갔다.

땅은 보았다. 자신의 흙이 일어서는 것을. 자신에게서 나왔으나 자신이 낸 것이 아닌 존재. 자신의 몸으로 지어졌으나 자신의 명령 밖에 있는 존재. 사람이었다.

이름을 부르는 자

얼마 지나지 않아 땅은 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.

“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” (창세기 2:19, 개역개정)

창조주께서 짐승들을 이끌고 가셨다. 땅에게서 난 것들이었다. 들짐승과 가축과 기는 것들, 땅이 제 몸을 열어 낸 생명들이 줄지어 사람 앞으로 나아갔다.

그리고 사람이 입을 열었다.

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곧 이름이 되었다. 하나가 불릴 때마다, 그 존재는 사람의 부름 안에 자리를 잡았다. 땅이 낳은 것들이, 하나씩, 사람의 것이 되어 갔다.

내가 만들었다.

땅의 깊은 곳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일었다.

내가 만들었다. 저 들짐승의 골격을 이룬 것은 나의 뼈 같은 바위였고, 저 가축의 살을 채운 것은 나의 살 같은 흙이었다. 저들의 첫 울음이 울린 곳도 나의 품이었다. 그런데 어째서 이름은 저 사람이 짓는가. 어째서 저들은 내가 아니라 사람의 부름에 응답하는가.

땅은 기다렸다. 마지막까지 기다렸다. 뱀이 사람 앞에 이끌려 갈 때, 창조주께서 한 번쯤 말씀해 주시기를. 이것은 땅이 낸 것 중에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. 그러나 그런 말씀은 없었다. 뱀도 다른 짐승들처럼 이름 하나를 받고 물러났을 뿐이었다.

자랑할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.

굴복할 수 없는 자

땅은 창조주를 원망하지 않았다. 원망할 수 없었다. 자신을 있게 하신 분이었고, 말씀 한마디로 자신에게 생명을 내게 하신 분이었다. 그 앞에서 땅은 언제나 엎드렸다. 그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질서였다.

그러나 사람은 달랐다.

사람은 자신의 일부였다. 자신의 몸에서 취한 흙으로 빚어진 존재였다.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에게 속했어야 했다. 땅에게서 난 모든 것이 땅에 속하듯이. 그런데 창조주는 그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을 정복하게 하겠다고 하셨다.

“…땅을 정복하라…” (창세기 1:28, 개역개정)

정복이라니. 땅은 그 말씀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. 자신의 흙으로 빚어진 존재에게, 자신이 정복당해야 한다니. 자신에게는 뱀이 있었다. 사람 못지않게 지혜로운, 자신이 낸 가장 빛나는 존재가 있었다. 그런데 어째서 복은 사람에게만 향하고, 다스림의 권위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가.

하나님께는 굴복할 수 있었다. 그러나 사람에게는, 할 수 없었다. 땅은 그렇게 생각했다. 절대로, 할 수 없다고.

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.

사람이 자신의 위를 걸을 때가 있었다. 그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땅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. 그 존재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. 흙으로 빚어졌으나 흙이 아닌 것. 자신에게서 나왔으나 자신에게 없는 것.

창조주의 위엄이었다.

사람 안에는 창조주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. 땅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부정할 수 없었다. 사람을 미워하려 할 때마다, 사람 안에서 자신이 엎드려 온 그분의 형상이 어른거렸다. 굴복할 수 없다는 생각과 굴복하고 싶어지는 떨림이 땅의 깊은 곳에서 함께 울렸다.

땅은 혼란스러웠다. 그리고 그 혼란 곁에, 뱀이 있었다. 땅이 낸 것 중 가장 지혜로운, 아직 아무 이름의 무게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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